영화추천... 추억의 명화 리뷰/90년대

<첨밀밀> 시대와 공간, 정체성과 감정이 교차하는 홍콩 멜로드라마의 정수

로더리고 2025. 6. 30. 18:00




첨밀밀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1997

 

홍콩 로맨스/멜로 115분15세이상 관람가

 

감독 진가신

 

출연 여명, 장만옥, 증지위, 양공여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다면, 천리 멀리에 떨어져 있어도 만나지만

 

無緣對面不相逢(무연대면불상봉)

 

인연이 없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살지라도 만나지 못한다.

 

 

 

1996년, 홍콩 반환을 불과 1년 앞둔 시점에 발표된 진가신(陳可辛, Peter Chan) 감독의 <첨밀밀>(Comrades: Almost a Love Story)은

진가신

 

‘사랑’이라는 가장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을 매개로 하여, 한 시대의 이주자 정체성, 도시적 소외, 그리고 낯선 공간에서의 인간적 갈망을 섬세하게 그려낸 걸작 멜로 드라마입니다.

 

 

 

1986~1987년

 

홍콩에서 소군(여명 분)과 이교(장만옥 분)의 운명적 만남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중국 본토출신이라는 것과

 

대만 최고의 가수 등려군을 좋아한다는 것과 자신의 꿈을 위해 홍콩에 왔다는 것 뿐이다.

 

소군에게는 약혼녀 소정이 있고, 이교에게는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고 있다.

 

낯선 홍콩의 거리에 떨어진 두 사람은 길잃은 유성처럼 서로 의지하고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이교는 등려군의 해적판 앨범을 팔려다 실패하고, 주식 투자에서도 큰 손실을 겪는다.

 

결국, 그는 돈을 잃고 안마시술소에서 일하게 된다.

 

소군은 그를 돕고 싶지만, 이교는 부담스러워하며 떠난다.

 

 

1990년

 

소군은 소정과 결혼하고, 이교에게 청첩장을 보낸다.

 

이교는 표형과 함께 소군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두 사람은 예전에 함께 있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서로의 감정이 여전함을 느낀다.

 

하지만 표형이 경찰의 증인으로 추적당하며, 이교는 표형과 함께 대만을 거쳐 미국으로 밀입국한다.

 

이교는 떠나고,

 

소군은 이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며 소정과 헤어진다.

 

 

1993년

 

소군은 뉴욕의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표형과 이교도 뉴욕에 있다.

 

둘은 서로 마주치지 못하다가, 표형이 동네 건달들에게 시비가 붙고 총에 맞아 죽는다.

 

이교는 추방당하고, 공항으로 가던 중 소군을 발견하지만, 결국 그를 놓친다.

 

 

1995년

 

뉴욕에서 이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이드 일을 하고,

 

소군은 계속해서 일한다.

 

 

이교는 TV에서 등려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옆에 서 있던 소군과 운명적으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는다.

 

 

1986년

 

홍콩 구룡역 열차.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채, 소군과 이교가 반대편 좌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다.

 

이 때, 소군 앞에서 그 동안 약삭빠른 체, 세상 물정을 조금이나마 더 아는 체 했던 이교의 진실이 밝혀진다.

 

사실 이교는 소군과 다를 바 없이, 같은 날 같은 시에 홍콩으로 입국했던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 둘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의 막이 내린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이유는, 단순한 로맨스의 구조 안에 이주민의 정체성, 계급적 긴장, 도시 공간의 낯섦이라는 사회적 층위와 서로 다른 생존 전략 속에서 점차 복잡한 감정을 세심하게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진가신 감독은 그 감정선을 과장하거나 도식화하지 않고, 마치 삶의 일면처럼 자연스럽게 펼쳐 보입니다.

 

 

 

홍콩이라는 도시는 이들에게 기회의 땅인 동시에 결코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곳입니다.

 

<첨밀밀>에서 도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대변하고 강화하는 심리적 환경(psychogeography)으로 기능합니다.

 

낡은 골목, 허름한 식당, 영어 학원, 마작방 등의 공간들은 ‘임시 거처’이자 ‘경계인의 풍경’입니다.

 

감독은 인물들이 이 도시와 맺는 관계를 통해,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의 경계성과 과도기적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이는 당시 홍콩 사회 전반에 깔려 있던 정치적 불안과 정체성 혼란을 은연중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요소는 등려군(鄧麗君)의 노래 '첨밀밀'입니다.

 

이 노래는 영화의 제목이자, 두 인물의 관계를 연결하고 추동하는 감정적 모티프로 작용합니다. 특히 이 곡이 흐를 때마다, 관객은 단순한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내면 감정, 과거의 향수, 그리고 시간의 경과를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등려군은 1980~90년대 중국 대중문화에서 ‘감정의 해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등려군

 

그녀의 노래는 억눌렸던 사적 감정과 로망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였고, 영화는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개인의 감정과 집단의 정서를 절묘하게 연결합니다.

 

 

 

장만옥은 이요라는 인물에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입체적인 연기를 불어넣으며, 도시적 세련미와 서민적 현실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갑니다.

 

그녀는 단지 로맨스의 대상으로 소비되지 않고, 현대 여성의 욕망과 생존 전략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습니다.

 

 

여명은 소군이라는 인물의 순진함, 성실함,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무뎌지는 감정의 변화까지 절제된 톤으로 훌륭히 표현해냈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선은 언제나 완벽히 교차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긋남이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서정성과 현실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은 깊지만, 현실은 언제나 한 발 앞서 이들을 끌고 가며, 그 틈에서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되묻습니다.

 

 

 

<첨밀밀>은 결과적으로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안에, 이민자와 경계인의 감정 지도, 도시적 정체성의 불확실성,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 작품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랑이 어떤 시대의 감정적 문법이었는지를 증명하는 한 편의 사회적 기록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뉴욕의 차가운 거리에서 두 주인공이 다시 조우하는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운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면이 영화의 정서적 구조 위에서 완벽하게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간직해 온 감정이 시공간을 넘어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제목이 상당히 특이한데, Comrades: Almost a Love Story(동지들: 거의 러브스토리에 가까운)이며 'comrades'는 실제로 공산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동지/동무'를 뜻합니다

 

 

 

16회 홍콩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진가신), 여우주연상(장만옥), 남우조연상(증지위), 각본상을 비롯한 9개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이 영화는 홍콩 반환 직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역사적 배경에서 해석하는 평이 많으며 대표적으로 소군-이교의 관계를 대륙과 홍콩의 관계를 은유했다고 보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있습니다.

 

본토 출신인 소군은 광동어도 영어도 제대로 할 줄 몰라 맥도날드에서 혼자 주문조차 할 수 없어 무시당하고, 약혼자와 이교에게 대놓고 같은 선물을 하려 들 정도로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본토 중국을 상징합니다.

 

반면 광동성 출신의, 이해타산적이고 자본주의 체제를 체화한 인물인 이교는 홍콩을 상징하지만 둘은 모두 대만 가수 등려군을 좋아합니다.

 

이를 통해서 본토 중국과 홍콩이 결국 본질적으로는 같은 뿌리임을 암시하며 대륙을 상징하는 소군, 홍콩을 상징하는 이교는 계속 엇갈리지만 결국 이역만리에서 인연이 성사되는데, 이는 갈등과 대립이 있을지라도 종국에는 홍콩은 중국으로 귀속됨을 은유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군을 중국, 이교를 홍콩으로만 해석하는 건 너무 인물을 단순하게 상징화시켜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좁게 만드는 면도 있는데, 결국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개인과 사람이기 때문이며 이 영화의 부제가 'Almost a love story' 인데, 이 점을 생각하면서 보면 <첨밀밀>은 결국 사랑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 영화는 주로 이교와 소군의 사랑을 메인 스토리로 하여 내용이 전개되지만, 조연들의 곁가지 같은 러브스토리도 쏠쏠한 재미를 줍니다.

 

증지위가 연기한 표형은 암흑가 보스이지만 이교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며,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이 연기한 영어 강사 제러미는 매춘부와 동거하지만, 철저히 욕구에 의해 만난 것처럼 보이는 둘은 마지막에 매춘부가 에이즈에 걸리자, 함께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납니다.

 

양공주 일을 하다 현재는 포주 노릇을 하는 소군의 고모는 영화 <모정>을 촬영하기 위해 홍콩에 로케이션 차 온 윌리엄 홀든과의 단 한 번의 로맨틱한 데이트를 죽을때까지 마음에 품고 삽니다.

 

이처럼 첨밀밀은 다양한 등장 인물들의 사랑을 그리는 군상극으로써도 훌륭한 작품입니다.

 

 

 

중국 본토에서는 정작 꽤 늦은 2015년에야 개봉했는데 개봉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자국인이 홍콩에 불법체류하는 설정때문이며 영화 말미에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홍콩인들이 돈 벌러 중국에 가는 모습이 보이듯, 현실 경제에서도 중국이 자신감을 가졌기에 2015년에라도 풀렸다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보통어(표준 중국어)와 광동어의 차이에서 비롯된 유머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중국어의 방언 차이는 한국어와 제주어의 차이보다 훨씬 커서, 사실상 서로 다른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1980년대 홍콩에서는 주로 영어와 광동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중국 본토 출신이 홍콩에 오면 가장 먼저 광동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이교(장만옥 분)는 광둥성 출신이라 보통어와 광동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홍콩 사람인 척 소군(여명 분)을 속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 소군처럼 본토 출신입니다.

 

 

 

<첨밀밀> 최고의 명장면 1

 

 

<첨밀밀> 최고의 명장면 2

 

 

<첨밀밀> 최고의 명장면 3

 

 

 

<첨밀밀>은 멜로드라마의 전형 속에서 시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감정을 고요하게 직조해낸 걸작입니다.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홍콩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이주민의 정체성, 그리고 등려군이라는 문화 아이콘까지 포괄하는 이 영화는, 지금 다시 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 감정의 고전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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